마르코만니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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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마르코만니 전쟁은 2세기 후반 로마 제국과 게르만 부족 간에 벌어진 일련의 전쟁으로, 안토니누스 피우스 황제 시대의 평화로운 시기가 끝나고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 치세에 발발했다. 160년대에 파르티아와의 전쟁 이후, 로마 제국은 안토니누스 역병으로 인해 심각한 피해를 입은 가운데, 게르만 부족들의 대규모 침략을 받았다. 마르코만니족을 비롯한 게르만 부족들은 도나우 강을 넘어 로마 영토를 침략했고, 이탈리아 본토까지 위협했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직접 군대를 이끌고 반격하여 마르코만니족을 격퇴했으나, 그의 사후 콤모두스 황제가 평화 조약을 맺으면서 전쟁은 마무리되었다. 이 전쟁은 로마 제국의 북쪽 국경의 취약성을 드러냈고, 게르만족의 대규모 이주를 초래하여 서로마 제국 멸망의 서곡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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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코만니 전쟁 - [전쟁]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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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쟁 개요 | |
분쟁 명칭 | 마르코만니 전쟁 |
영어 명칭 | Marcomannic Wars |
일부 | 로마-게르만 전쟁 |
![]() | |
기간 | 166년–180년 (14년간) |
위치 | 도나우강 일대 (로마 제국의 유럽 북동부 국경) |
결과 | 로마의 승리 |
영토 변화 | "사르마티아" (헝가리 평원)와 "마르코만니아" (도나우강 이북의 모라비아, 슬로바키아, 바이에른)를 합병하려던 로마의 계획 철폐. 전쟁 이전 상태 복귀 |
교전 세력 | |
교전국 1 | [[파일:Vexilloid of the Roman Empire.svg|18px|alt=|link=]] 로마 제국 |
교전국 1 - 참여 부대 | 참전한 전체 부대 목록 |
교전국 2 | 야만족의 여러 세력 |
교전국 2 - 주요 교전 세력 | 마르코만니족, 콰디족, 야지게스족 |
교전국 2 - 개입 세력 | 나리스티족, 카티족, 카우키족, 랑고바르드족, 헤르문두리족, 수에비족, 부리족, 코티니족, 반달족 (아스팅기족, 라크링기족, 빅토할리족), 록솔라니족, 바스타르나이족, 코스토보키족, 아란족 |
지휘관 | |
로마 제국 | 황제 일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루키우스 베루스, Ti. 클라우디우스 폼페이아누스, 콤모두스 |
로마 제국 - 친위대 사령관 | 티투스 푸리우스 빅토리누스, 마르쿠스 바사이우스 루푸스, 마르쿠스 마크리니우스 빈덱스, P. 타루테니우스 파테르누스 |
로마 제국 - 야전 지휘관 | 푸블리우스 헬비우스 페르티낙스, 마르쿠스 클라우디우스 프론토, 마르쿠스 디디우스 율리아누스, 가이우스 페스켄니우스 니게르, 데키무스 클로디우스 알비누스, M. 발레리우스 막시미아누스, 루키우스 갈루스 율리아누스, 가이우스 베티우스 사비니아누스, 티투스 비트라시우스 폴리오 |
야만족 | 마르코만니족: 발로마르, 콰디족: 아리오가이수스, 야지게스족: 바나다스푸스, 잔티쿠스, 나리스티족: 발라오 |
병력 규모 | |
로마 제국 | 군단 13개, 벡실라티오 2개, 다뉴브 함대, 보조군 코호르스 58개 |
야만족 | 977,000명 |
피해 규모 | |
로마 제국 | 보통의 피해 |
야만족 | 막대한 피해 |
2. 배경
안토니누스 피우스 황제는 재위 기간 대부분 동안 안정적인 로마 제국을 통치했다. 그는 이탈리아를 떠나지 않았고, 추가적인 정복 활동도 하지 않았으며, 속주의 레가투스(총독)들이 군단을 완전히 지휘하도록 허락했다. 역사가 에이드리언 골드워시는 안토니누스 피우스가 군사 활동을 주저한 것이 파르티아 제국의 영토적 야망을 키웠을 수도 있다고 추정한다.
안토니누스 피우스 황제 사후, 161년부터 166년까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와 루키우스 베루스 공동 황제는 파르티아와 전쟁을 벌였다. 이 전쟁은 성공적이었지만, 로마 제국에 안토니누스 역병을 가져와 700만에서 800만 명의 사망자를 내고 제국을 약화시켰다.[3] 그러나 역사가 카일 하퍼는 이 역병이 제국에 치명타는 아니었으며, 출산율 증가 등으로 회복력을 보였다고 주장한다.[4][5]
161년부터 166년까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와 루키우스 베루스의 공동 통치 기간 동안 파르티아와 로마 간의 전쟁이 벌어졌다. 이 전쟁은 성공적으로 끝났지만, 로마 제국에 예상치 못한 결과를 가져왔다. 귀환한 병력들은 안토니누스 역병이라 불리는 페스트를 가져왔는데, 이 역병은 700만에서 800만 명의 목숨을 앗아가며 제국을 심각하게 약화시켰다. 그러나 역사가 카일 하퍼는 이 역병이 제국에 치명적인 타격은 아니었으며, 오히려 역병 직후 로마의 출산율이 증가하여 제국의 회복력을 보여주었다고 주장한다.
같은 시기, 2세기 중부 유럽에서는 민족 대이동의 첫 번째 움직임이 나타났다. 고트족이 비스와강 하구(비엘바르크 문화)의 조상 땅에서 남동쪽으로 이동하면서 북쪽과 동쪽의 게르만 부족들에게 압력을 가했다. 그 결과, 게르만 부족들과 다른 유목 민족들은 로마의 북쪽 국경 너머, 특히 갈리아와 다뉴브강 너머로 약탈을 시작했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상대해야 했던 이 갑작스러운 인구 이동은 기후 변화나 인구 증가의 결과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아르미니우스의 통일 게르만 제국이라는 꿈을 실현하려는 시도의 일환으로, 제국 주변의 여러 게르만 부족들이 로마의 결의를 시험하기 위해 공모했을 수 있다는 이론도 존재한다.
이 전쟁 이전까지 마르코만니족과 콰디족은 로마 제국과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며 로마 상품에 접근할 수 있었다. 로마 가정 용품 및 관습에 대한 고고학적 증거는 이러한 접촉을 보여준다. 로마 제국은 거의 모든 지역에서 군사적, 영토적 지배와 상호 이익이 되는 무역을 결합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
네르바-안토니누스 왕조 시대에는 하드리아누스 황제가 강화한 방비 덕분에 평온한 정세가 이어졌다. 그러나 안토니누스 피우스 황제 시대에 국경이 점차 불안정해졌고, 그의 조카인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는 즉위 후 파르티아와의 전쟁에 임해야 했다. 이 전쟁은 장군 가이우스 아비디우스 카시우스의 활약으로 승리했지만, 원정을 위해 라인-도나우 국경의 전력이 약화되었다. 설상가상으로, 안토니누스 역병으로 제국은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4] 국경 방비 약화와 역병에 더해, 국경 지대보다 훨씬 동쪽에서 야만족 간의 분쟁이 일어나 국경은 더욱 불안한 상태가 되었다.
162년, 도나우 강 주변의 여러 세력이 일제히 강을 건너 로마 영내를 침공하면서 마르코만니 전쟁이 시작되었다.
3. 전쟁의 전개
2세기 중부 유럽에서는 민족 대이동이 시작되어, 고트족이 비스와강 하구 (비엘바르크 문화)에서 남동쪽으로 이동하며 게르만 부족들에게 압력을 가했다. 이로 인해 게르만 부족들과 다른 유목 민족들이 로마의 북쪽 국경, 특히 갈리아와 다뉴브강 너머로 약탈을 시작했다.[6] 이러한 갑작스러운 이동은 기후 변화나 인구 증가, 혹은 아르미니우스의 통일 게르만 제국에 대한 꿈의 영향일 수 있다는 이론이 있다.[7][8] 마르코만니족과 콰디족은 로마와 우호적 관계를 유지하며 로마 상품을 교역했지만, 군사적, 영토적 지배와 상호 무역을 목표로 하는 로마 제국의 정책과 맞물려 긴장이 고조되었다.[9][10]
161년경, 로마 국경의 압력이 최고조에 달했고, 게르만 부족들은 생존을 위해 로마 영토를 침략해야 한다고 결론 내렸다.[11] 162년부터 165년까지 카티족과 카우키족이 라이티아와 게르마니아 수페리오르를 침입했지만 격퇴되었다. 166년 말 또는 167년 초, 랑고바르드족과 라크링기족 6,000명이 판노니아를 공격했으나, 아디우트릭스 제1군단의 벡실라티오 부대와 울피아 콘타리오룸 기병대가 이들을 격퇴했다. 이후 판노니아 총독 마르쿠스 얄리우스 바수스는 11개 부족과 협상을 시작했고, 마르코만니족 왕 발로마르가 중재자 역할을 했다. 휴전은 합의되었지만 영구적인 합의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같은 해, 반달족 (아스팅기족과 라크링기족)과 사르마티아계 야지게스족이 다키아를 침입하여 총독 칼푸르니우스 프로쿨루스를 죽였다. 이에 맞서 마케도니카 제5군단이 모이시아 인페리오르에서 다키아 수페리오르로 이동했다.
168년, 안토니누스 역병의 창궐로 연기되었던 로마의 반격이 시작되었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루키우스 베루스와 함께 아퀼레이아에 본부를 설치하고, 제2 이탈리카 군단과 제3 이탈리카 군단을 창설하여 알프스를 넘어 판노니아로 진군했다. 마르코만니족과 빅투알리족이 도나우강을 건너왔으나, 황제 군대의 접근에 물러났다. 두 황제는 아퀼레이아에서 겨울을 보냈으나, 169년 1월 루키우스 베루스가 사망했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로마로 돌아가 장례를 치렀다.
169년 가을,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클라우디우스 폼페이아누스를 부장으로 삼아 야지게스족 토벌에 나섰으나, 전투는 교착 상태에 빠졌다. 이 틈을 타 코스토보키족이 트라키아를 약탈하고 엘레우시스 신전을 파괴했다. 마르코만니족의 왕 발로마르는 동맹을 맺고 도나우강을 건너 카르눈툼을 공격, 로마군 2만 명을 전사시켰다. 발로마르 군대는 오데르초를 파괴하고 아퀼레이아를 포위하여, 로마 본토가 킴브리-튜튼족 전쟁 이후 처음으로 위협받았다.
171년, 로마는 반격을 준비했다. 클라우디우스 폼페이아누스 지휘 아래 여러 국경의 병력이 파견되었고, 페르티낙스가 부관으로 참전했다. '이탈리아 알프스 국경 수비대'가 설치되고, 다뉴브 함대가 강화되었다. 로마는 외교 활동을 통해 하스딩기족 계열의 반달족, 라크링기족과 동맹을 맺고, 콰디족, 야지게스족과 강화 조약을 체결했다.
172년, 로마군은 도나우강을 건너 마르코만니족을 굴복시키고,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게르마니쿠스' 칭호를 얻었다. 173년, 로마는 콰디족을 제압하고, '기적의 비' 사건이 일어났다. 풀미나타 제12군단이 콰디족에 포위되었으나, 갑작스러운 소나기로 로마군은 생기를 되찾고 콰디족은 천둥에 강타당했다. 카시우스 디오는 이집트 마법사의 기도로, 테르툴리아누스는 기독교인들의 기도로 일어난 일이라고 주장했다.
174년, 로마는 콰디족을 완전히 복종시켰다. 175년, 로마는 야지게스족을 격파하고 조약을 체결, 야지게스족은 포로 반환과 보조병을 제공했다. 마르쿠스는 '사르마티쿠스' 칭호를 얻었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새로운 로마 속주를 건설하려 했으나, 아비디우스 카시우스의 반란으로 계획이 중단되었다.
177년 콰디족과 마르코만니족이 반란을 일으키자,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두 번째 게르만족 군사 활동을 시작했다. 178년 8월 카르눈툼에 도착한 그는 179년과 180년에 걸쳐 마르코만니족과 콰디족을 상대로 군사 활동을 전개했다. 마르쿠스 발레리우스 막시미아누스 지휘 하의 로마군은 라우가리키오(오늘날 슬로바키아 트렌친 인근)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콰디족에게 승리했다. 콰디족은 서쪽으로 추격당했고, 푸블리우스 타루테니우스 파테르누스가 이들을 상대로 다시 한번 승리했으나, 180년 3월 17일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빈도보나(오늘날 빈)에서 사망했다.
콤모두스는 아버지의 죽음 이후 전쟁을 계속하는 데 관심이 없었다. 그는 장군들의 조언에도 불구하고 마르코만니족 및 콰디족과 평화 조약을 맺었다. 180년 가을, 로마로 돌아가 10월 22일에 개선식을 치렀다.
야지게스족, 부리족 그리고 도나우강과 로마령 다키아 사이에 거주하던 이른바 자유 다키아인을 상대로 한 군사 활동은 계속되었다. 이 전쟁에 대해선 마르쿠스 발레리우스 막시미아누스, 페스켄니우스 니게르, 클로디우스 알비누스 등의 로마 장군들을 제외하고는 많이 알려진 것은 없다. 이들이 얻어낸 승리들은 콤모두스 황제가 182년 중엽에 '게르마니쿠스 막시무스'라는 칭호를 주장하기에 충분했던 것으로 보인다.
3. 1. 제1차 마르코만니 전쟁 (166년-175년)
안토니누스 피우스 황제 사후,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와 루키우스 베루스 공동 황제는 161년부터 166년까지 파르티아와 전쟁을 벌였다. 이 전쟁은 성공적이었지만, 로마 제국에 안토니누스 역병이라 불리는 페스트를 가져와 700만에서 800만 명의 사망자를 내고 제국을 약화시켰다.[3] 그러나 역사가 카일 하퍼(Kyle Harper)는 이 역병이 제국에 치명타는 아니었으며, 출산율 증가 등으로 회복력을 보였다고 주장한다.[4][5]
2세기 중부 유럽에서는 민족 대이동이 시작되어, 고트족이 비스와강 하구 (비엘바르크 문화)에서 남동쪽으로 이동하며 게르만 부족들에게 압력을 가했다. 이로 인해 게르만 부족들과 다른 유목 민족들이 로마의 북쪽 국경, 특히 갈리아와 다뉴브강 너머로 약탈을 시작했다.[6] 이러한 갑작스러운 이동은 기후 변화나 인구 증가, 혹은 아르미니우스의 통일 게르만 제국에 대한 꿈의 영향일 수 있다는 이론이 있다.[7][8] 마르코만니족과 콰디족은 로마와 우호적 관계를 유지하며 로마 상품을 교역했지만, 군사적, 영토적 지배와 상호 무역을 목표로 하는 로마 제국의 정책과 맞물려 긴장이 고조되었다.[9][10]
161년경, 로마 국경의 압력이 최고조에 달했고, 게르만 부족들은 생존을 위해 로마 영토를 침략해야 한다고 결론 내렸다.[11] 162년부터 165년까지 카티족과 카우키족이 라이티아와 게르마니아 수페리오르를 침입했지만 격퇴되었다. 166년 말 또는 167년 초, 랑고바르드족과 라크링기족 6,000명이 판노니아를 공격했으나, 아디우트릭스 제1군단의 벡실라티오 부대와 울피아 콘타리오룸 기병대가 이들을 격퇴했다.
이후 판노니아 총독 마르쿠스 얄리우스 바수스는 11개 부족과 협상을 시작했고, 마르코만니족 왕 발로마르가 중재자 역할을 했다. 휴전은 합의되었지만 영구적인 합의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같은 해, 반달족 (아스팅기족과 라크링기족)과 사르마티아계 야지게스족이 다키아를 침입하여 총독 칼푸르니우스 프로쿨루스를 죽였다. 이에 맞서 마케도니카 제5군단이 모이시아 인페리오르에서 다키아 수페리오르로 이동했다.
168년, 안토니누스 역병의 창궐로 연기되었던 로마의 반격이 시작되었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루키우스 베루스와 함께 아퀼레이아에 본부를 설치하고, 제2 이탈리카 군단과 제3 이탈리카 군단을 창설하여 알프스를 넘어 판노니아로 진군했다. 마르코만니족과 빅투알리족이 도나우강을 건너왔으나, 황제 군대의 접근에 물러났다. 두 황제는 아퀼레이아에서 겨울을 보냈으나, 169년 1월 루키우스 베루스가 사망했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로마로 돌아가 장례를 치렀다.
169년 가을,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클라우디우스 폼페이아누스를 부장으로 삼아 야지게스족 토벌에 나섰으나, 전투는 교착 상태에 빠졌다. 이 틈을 타 코스토보키족이 트라키아를 약탈하고 엘레우시스 신전을 파괴했다. 마르코만니족의 왕 발로마르는 동맹을 맺고 도나우강을 건너 카르눈툼을 공격, 로마군 2만 명을 전사시켰다. 발로마르 군대는 오데르초를 파괴하고 아퀼레이아를 포위하여, 로마 본토가 킴브리-튜튼족 전쟁 이후 처음으로 위협받았다.
171년, 로마는 반격을 준비했다. 클라우디우스 폼페이아누스 지휘 아래 여러 국경의 병력이 파견되었고, 페르티낙스가 부관으로 참전했다. '이탈리아 알프스 국경 수비대'가 설치되고, 다뉴브 함대가 강화되었다. 로마는 외교 활동을 통해 하스딩기족 계열의 반달족, 라크링기족과 동맹을 맺고, 콰디족, 야지게스족과 강화 조약을 체결했다.
172년, 로마군은 도나우강을 건너 마르코만니족을 굴복시키고,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게르마니쿠스' 칭호를 얻었다. 173년, 로마는 콰디족을 제압하고, '기적의 비' 사건이 일어났다. 풀미나타 제12군단이 콰디족에 포위되었으나, 갑작스러운 소나기로 로마군은 생기를 되찾고 콰디족은 천둥에 강타당했다. 카시우스 디오는 이집트 마법사의 기도로, 테르툴리아누스는 기독교인들의 기도로 일어난 일이라고 주장했다.
174년, 로마는 콰디족을 완전히 복종시켰다. 175년, 로마는 야지게스족을 격파하고 조약을 체결, 야지게스족은 포로 반환과 보조병을 제공했다. 마르쿠스는 '사르마티쿠스' 칭호를 얻었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새로운 로마 속주를 건설하려 했으나, 아비디우스 카시우스의 반란으로 계획이 중단되었다.
3. 1. 1. 초기 침공 (166년-167년)
안토니누스 피우스 황제가 안정적인 통치를 한 후,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와 루키우스 베루스 공동 황제는 161년부터 166년까지 파르티아와 전쟁을 벌였다. 이 전쟁은 성공적이었지만, 로마 제국에 안토니누스 역병이라 불리는 페스트를 가져와 700만에서 800만 명의 사망자를 내고 제국을 약화시켰다.[3] 그러나 역사가 카일 하퍼(Kyle Harper)는 이 역병이 제국에 치명타는 아니었으며, 출산율 증가 등으로 회복력을 보였다고 주장한다.[4][5]
2세기 중부 유럽에서는 민족 대이동이 시작되어, 고트족이 비스와강 하구 (비엘바르크 문화)에서 남동쪽으로 이동하며 게르만 부족들에게 압력을 가했다. 이로 인해 게르만 부족들과 다른 유목 민족들이 로마의 북쪽 국경, 특히 갈리아와 다뉴브강 너머로 약탈을 시작했다.[6] 이러한 갑작스러운 이동은 기후 변화나 인구 증가, 혹은 아르미니우스의 통일 게르만 제국에 대한 꿈의 영향일 수 있다는 이론이 있다.[7][8] 마르코만니족과 콰디족은 로마와 우호적 관계를 유지하며 로마 상품을 교역했지만, 군사적, 영토적 지배와 상호 무역을 목표로 하는 로마 제국의 정책과 맞물려 긴장이 고조되었다.[9][10]
161년경, 로마 국경의 압력이 최고조에 달했고, 게르만 부족들은 생존을 위해 로마 영토를 침략해야 한다고 결론 내렸다.[11] 162년부터 165년까지 카티족과 카우키족이 라이티아와 게르마니아 수페리오르를 침입했지만 격퇴되었다. 166년 말 또는 167년 초, 랑고바르드족과 라크링기족 6,000명이 판노니아를 공격했으나, 아디우트릭스 제1군단의 벡실라티오 부대와 울피아 콘타리오룸 기병대가 이들을 격퇴했다.[12]
이후 판노니아 총독 마르쿠스 얄리우스 바수스는 11개 부족과 협상을 시작했고, 마르코만니족 왕 발로마르가 중재자 역할을 했다. 휴전은 합의되었지만 영구적인 합의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같은 해, 반달족 (아스팅기족과 라크링기족)과 사르마티아계 야지게스족이 다키아를 침입하여 총독 칼푸르니우스 프로쿨루스를 죽였다. 이에 맞서 마케도니카 제5군단이 모이시아 인페리오르에서 다키아 수페리오르로 이동했다.
3. 1. 2. 로마의 판노니아 원정 (168년)
161년,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 재위 기간에 로마 국경의 압박은 임계점에 이르렀다. 라인강과 다뉴브강을 따라 로마 국경에 위치한 게르만 부족들은 생존을 위해 로마 영토를 침략해야 한다고 결론 내렸다. 162년부터 165년까지 라에티아와 게르마니아 수페리오르 속주에 대한 카티족과 초키족의 침략은 격퇴되었다. 166년 말 또는 167년 초, 수천 명의 랑고바르디족과 라크린기족(또는 오비이족)이 판노니아를 침략했다. 이 부족들은 이미 로마 국경을 따라 정착해 있던 부족들에게 압력을 가했다.
이 침략은 지역 병력(벡실라티오로 구성된 특정 칸디두스 사령관 휘하의 ''제1 아디우트릭스 군단''과 빈덱스 사령관 휘하의 ''알라 울피아 콘타리오룸'')에 의해 비교적 쉽게 격파되었지만, 앞으로 닥칠 일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였다. 그 후, 판노니아의 군사 총독인 마르쿠스 야릴리우스 바수스는 11개 부족과 협상을 시작했다. 이 협상에서 로마의 종속국이었던 마르코만니족 왕 발로마르는 중재자 역할을 하며, 침략한 게르만 부족들의 행동을 일탈 행위로 치부했다. 결국 휴전이 합의되었고 부족들은 로마 영토에서 철수했지만, 영구적인 합의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로마인들은 이 당시 이미 파르티아와 전쟁을 벌이고 있었기 때문에, 이 갈등을 종식시키기 위한 외교적 조치는(''bellum suspensum'')는 성공적인 것으로 간주되었지만, 원래 침략에 어떤 부족들이 참여했는지는 여전히 불분명하다.
안토니누스 역병이 제국을 휩쓸면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더 이상 할 수 있는 일이 없었고, 그가 직접 이끌려고 계획했던 징벌 원정은 168년으로 연기되었다. 그해 봄,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루키우스 베루스와 함께 로마를 출발하여 아퀼레이아에 본부를 설치했다. 두 황제는 이탈리아와 일리리쿰의 방어 재조직을 감독하고, 새로운 군단 두 개, ''제2 이탈리카 군단''과 ''제3 이탈리카 군단''을 창설하여 알프스를 넘어 판노니아로 진군했다. 마르코만니족과 빅투알리족은 도나우강을 건너 이 지역으로 진입했지만, 적어도 ''아우구스타 열전''에 따르면, 황제 군대의 카르눈툼 접근만으로도 그들이 물러나고 선량한 행동을 약속하기에 충분했던 것으로 보인다. 두 황제는 겨울을 나기 위해 아퀼레이아로 돌아갔지만, 169년 1월 루키우스 베루스는 뇌졸중으로 쓰러져 사망했다. 마르쿠스는 공동 황제의 장례식을 감독하기 위해 로마로 돌아갔고, 그를 신격화했다.
168년, 연기되었던 로마 측의 반격 계획이 발동되어, 아퀼레이아 시에 설치된 본진에 공동 황제 루키우스 베루스와 함께 진을 쳤다. 아우렐리우스 황제는 새롭게 이탈리아 본토에서 제2군단 '이탈리카'와 제3군단 '이탈리카'를 증원하여 원정에 대비했다. 로마 제국의 친정군은 알프스 산맥을 넘어 일리리아 지방으로 진출, 카르눈툼으로 본진을 이동시켰다. 이미 야만족 측은 도나우 강을 도하한 상태였지만, 원정군의 카르눈툼 입성은 큰 위협이 되어 그들과의 협상 재개를 가능하게 했다.
도중, 겨울을 피해 아퀼레이아로 귀국한 루키우스 베루스가 급사하는 사건이 발생한다[5]. 무능한 공동 황제를 귀찮게 여긴 아우렐리우스 황제가 암살했다는 말도 있지만, 원인은 확실하지 않다. 아우렐리우스 황제는 로마로 돌아가 루키우스 황제의 장례를 주관했다.
3. 1. 3. 야지게스족에 대한 원정과 게르만족의 이탈리아 침입 (169년-170년)
161년,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 재위 기간에 로마 국경의 압박은 임계점에 이르렀다. 라인강과 다뉴브강을 따라 로마 국경에 위치한 게르만 부족들은 생존을 위해 로마 영토를 침략해야 한다고 결론 내렸다.[1] 162년부터 165년까지 라에티아와 게르마니아 수페리오르 속주에 대한 카티족과 초키족의 침략은 격퇴되었다.[2] 166년 말 또는 167년 초, 수천 명의 랑고바르디족과 라크린기족(또는 오비이족)이 판노니아를 침략했다.[3] 이 부족들은 이미 로마 국경을 따라 정착해 있던 부족들에게 압력을 가했다.[4]
이 침략은 지역 병력(벡실라티오로 구성된 특정 칸디두스 사령관 휘하의 ''제1 아디우트릭스 군단''과 빈덱스 사령관 휘하의 ''알라 울피아 콘타리오룸'')에 의해 비교적 쉽게 격파되었지만, 앞으로 닥칠 일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였다. 그 후, 판노니아의 군사 총독인 마르쿠스 야릴리우스 바수스는 11개 부족과 협상을 시작했다.[5] 이 협상에서 로마의 종속국이었던 마르코만니족 왕 발로마르는 중재자 역할을 하며, 침략한 게르만 부족들의 행동을 일탈 행위로 치부했다.[6] 결국 휴전이 합의되었고 부족들은 로마 영토에서 철수했지만, 영구적인 합의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로마인들은 이 당시 이미 파르티아와 전쟁을 벌이고 있었기 때문에, 이 갈등을 종식시키기 위한 외교적 조치는 성공적인 것으로 간주되었지만, 원래 침략에 어떤 부족들이 참여했는지는 여전히 불분명하다.[7]
169년 가을,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자신의 사위이자 장녀 루킬라 (루키우스 황제의 황후였다)의 재혼 상대인 클라우디우스 폼페이아누스를 부장으로 삼아 다시 출진했다. 이번 목표는 반달족과 함께 다키아를 휩쓸고 다니는 유목 세력인 야지게스 족을 토벌하는 것이었다. 이보다 앞서 야지게스 족의 세력은 다키아에서 확대를 거듭했고, 원군을 파견한 하모에시아 총독 클라우디우스 프론토도 전사시켰다. 그러나 야지게스 족과의 싸움은 뜻대로 진행되지 않고 정체되었고, 원정군은 헛되이 시간을 낭비하는 상태가 되었다.[8] 로마인들은 군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황실 소유의 재산을 경매에 부쳐야 했는데, 역사가 마이클 쿨리코프스키는 이미 짐이 무거운 시민들에게 세금을 인상하는 대신 수입을 창출하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꼬집어 말했다.[9]
야지게스 족과의 고전을 틈타 다른 세력이 틈새를 노려 국경 지대로 침입하기 시작했다. 코스토보키 족은 속주 트라키아의 방비를 뚫고 발칸 반도 북부에 침입하여 일대에서 약탈을 벌였고, 트라키아는 황폐해졌다. 게다가 코스토보키 족은 발칸 반도를 남하하여 아테네 시에 도달해 엘레우시스 신전을 파괴하는 등 만행을 저질렀다. 하지만 로마에게 최대의 위기는 비교적 로마에 우호적인 자세를 유지해 온 마르코만니 족의 배신이었다.[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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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코만니 왕 발로마르는 주변 세력과 동맹을 맺고 도나우 강을 일제히 도하하여 카르눈툼의 로마 원정군 본진을 강습했다. 이 전투에서 아우렐리우스 황제는 대패하여 로마군은 원정군 병사 중 2만 명이 전사하는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일부 군세가 속주 노리쿰으로 진격하여 약탈을 자행하는 동안, 발로마르 왕은 대다수의 군세를 이끌고 궤멸된 로마 제국군을 쫓아 이탈리아 본토로 군대를 진격시켰다. 아우렐리우스 황제는 발로마르 군의 진격을 막지 못하고, 본토 북서부의 입구인 오데르초 시가 파괴된 데다, 제2의 본진인 아퀼레이아 시가 포위되었다.[11]
로마의 본토가 위협받은 것은, 과거 공화정 말기의 대장군 가이우스 마리우스가 킴브리-튜튼족 전쟁에서 야만족과의 결전에 임한 이후 (기원전 101년)의 일이었다.
3. 1. 4. 로마의 반격과 마르코만니족의 패배 (171년-175년)
171년, 아퀼레이아 포위가 풀리고 침입자들이 로마 영토에서 추방되면서, 로마는 반격 준비를 갖췄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여러 국경의 병력을 발로마르에 맞서 파견했고, 이들은 클라우디우스 폼페이아누스의 지휘 아래 있었다. 미래의 황제 페르티낙스가 그의 부관 중 한 명이었다.[12] 이탈리아로 향하는 도로를 보호하기 위해 새로운 군사 지휘부인 '이탈리아 알프스 국경 수비대'(praetentura Italiae et Alpium)가 설치되었고, 다뉴브 함대는 전력이 강화되었다.[12]
로마는 다뉴브강을 도하하기 위해 여러 야만 부족들을 상대로 외교 활동을 펼쳤다. 하스딩기족 계열의 반달족과 라크링기족은 로마와 동맹을 맺었고, 콰디족과 야지게스족과는 강화 조약이 체결되었다.[12]
172년, 로마군은 도나우강을 건너 마르코만니족의 영토로 진입했다. 자세한 내용은 거의 알려져 있지 않지만, 로마는 마르코만니족과 그들의 동맹인 바리스티족 또는 나리스티족, 코티니족을 굴복시키는 데 성공했다.[12]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게르마니쿠스' 칭호를 얻었고, '게르마니아 카프타'(Germania capta, 굴복시킨 게르마니아)라는 문구가 새겨진 주화가 발행되었다.[12] 이 전쟁 동안, 나리스티족의 족장은 로마 장군 마르쿠스 발레리우스 막시미아누스에게 전사했다.[12]
173년, 로마는 조약을 깨고 동족을 지원하던 콰디족을 상대로 군사 활동을 벌여 제압하고 복종시켰다.[12] 이 기간에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원주와 주화에 묘사된 '기적의 비' 사건이 일어났다. 풀미나타 제12군단이 콰디족에 포위되어 항복할 뻔했으나, 갑작스러운 소나기로 로마군은 생기를 되찾고 콰디족은 천둥에 강타당했다.[6] 동시대 사람들과 역사가들은 이를 신성한 개입으로 보았다. 카시우스 디오는 이집트 출신 마법사가 메르쿠리우스에게 기도하여 일어난 일이라 했고, 테르툴리아누스 같은 기독교인 작가들은 기독교인들의 기도로 벌어진 것으로 보았다.[6]
같은 해, 디디우스 율리아누스는 카티족과 헤르문두리족의 침입을 격퇴했고, 카우키족은 갈리아 벨기카 해안선을 약탈했다.[12]
174년, 로마는 콰디족을 상대로 진격, 친로마 왕 푸르티우스를 폐위시키고 아리오가이수스를 왕위에 올린 콰디족을 완전히 복종시켰다.[7] 콰디족은 인질을 제공하고 로마군에 보조병을 보내야 했으며, 수비대가 이들 영토 곳곳에 배치되었다.[12]
175년, 로마는 티서강 평원에 살던 야지게스족에게 관심을 돌렸다. 몇 차례 승리 후, 야지게스족의 왕 잔티쿠스는 로마인 포로 100,000명을 전하고, 보조군 기병대 8,000명을 제공하는 조약을 체결했다. 이 중 많은 수 (5,500명)가 브리타니아로 보내졌다.[8][9] 마르쿠스는 '사르마티쿠스'라는 칭호를 얻었다.[12]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마르코만니아'와 '사르마티아'라는 새로운 로마 속주 두 곳을 건설하려 했으나, 동방에서 아비디우스 카시우스의 반란으로 계획이 중단되었다.[10]
3. 2. 제2차 마르코만니 전쟁 (177년-180년)
177년 콰디족과 마르코만니족이 반란을 일으키자,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두 번째 게르만족 군사 활동('secunda expeditio germanica')을 시작했다. 178년 8월 카르눈툼에 도착한 그는 179년과 180년에 걸쳐 마르코만니족과 콰디족을 상대로 군사 활동을 전개했다. 마르쿠스 발레리우스 막시미아누스 지휘 하의 로마군은 라우가리키오(Laugaricio, 오늘날 슬로바키아 트렌친 인근)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콰디족에게 승리했다.[11] 콰디족은 서쪽으로 추격당했고, 푸블리우스 타루테니우스 파테르누스가 이들을 상대로 다시 한번 승리했으나,[11] 180년 3월 17일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빈도보나(오늘날 빈)에서 사망했다.[11]
콤모두스는 아버지의 죽음 이후 전쟁을 계속하는 데 관심이 없었다. 그는 장군들의 조언에도 불구하고 마르코만니족 및 콰디족과 평화 조약을 맺었다.[11] 180년 가을, 로마로 돌아가 10월 22일에 개선식을 치렀다.[11]
182년, 콤모두스는 원로원으로부터 "'''게르마니쿠스 막시무스'''"(Germanicus Maximus)라는 칭호를 받았다. 이 전쟁으로 도나우강과 라인강 유역의 국경 방어가 불충분하다는 것이 드러났고, 이후 33개 군단 중 16개 군단이 이 지역에 배치되었다.
콤모두스가 맺은 평화는 오래 지속되었지만, 4세기와 5세기에 동란이 본격화되면서 야만족이 다시 로마 영내로 침입하기 시작했고, 제국군은 더 이상 이들을 막을 수 없었다.
3. 3. 콤모두스의 종전 (180년-182년)
콤모두스는 아버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죽은 뒤에 전쟁을 계속하는 데 거의 관심이 없었다. 콤모두스는 고참 장군들의 조언에도 불구하고 마르코만니족 및 콰디족과 평화 조약을 맺었다. 그런 다음 그는 서기 180년 가을 초에 로마로 떠나, 10월 22일에 개선식을 치렀다.[10]
야지게스족, 부리족 그리고 도나우강과 로마령 다키아 사이에 거주하던 이른바 자유 다키아인을 상대로 한 군사 활동은 계속되었다. 이 전쟁에 대해선 마르쿠스 발레리우스 막시미아누스, 페스켄니우스 니게르, 클로디우스 알비누스 등의 로마 장군들을 제외하고는 많이 알려진 것은 없다. 이들이 얻어낸 승리들은 콤모두스 황제가 182년 중엽에 '게르마니쿠스 막시무스'라는 칭호를 주장하기에 충분했던 것으로 보인다.[10]
한 비문 (CIL III 5937)은 루기족 혹은 부리족 등의 게르만 부족에 대한 군사 활동 (Expeditio Burica)을 묘사한다.[10]
4. 전쟁의 결과 및 영향
안토니누스 피우스 황제는 재위 기간 동안 이탈리아를 떠나지 않고 추가적인 정복 활동을 하지 않으면서 안정에 힘썼다. 그는 속주의 레가투스(총독)들에게 군단 지휘를 맡겼다. 역사학자 에이드리언 골드워시는 피우스의 이러한 군사적 소극성이 파르티아의 영토에 대한 욕망을 키웠을 수 있다고 추정한다. 파르티아 제국과 로마 간의 전쟁은 161년부터 166년까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와 루키우스 베루스 공동 황제 시기에 벌어졌는데, 이 전쟁은 성공적으로 끝났지만 로마 제국에 예상치 못한 결과를 가져왔다. 귀환한 병사들이 페스트(안토니누스 역병)를 옮겨와 700만~800만 명의 사망자를 내며 제국을 약화시켰다. 그러나 역사가 카일 하퍼는 이 역병이 로마 제국에 치명타가 아니었으며, 오히려 역병 직후 출산율 증가로 로마가 회복력을 보였다고 주장한다.
한편 2세기 중부 유럽에서는 민족 대이동의 첫 움직임이 나타났다. 고트족이 비스와강 하구의 비엘바르크 문화 지역에서 남동쪽으로 이동하면서 북쪽과 동쪽의 게르만 부족들을 압박했다. 그 결과 게르만 부족들과 다른 유목 민족들이 로마의 북쪽 국경 너머, 특히 갈리아와 다뉴브강 너머로 약탈을 시작했다. 이러한 갑작스러운 이주 물결은 기후 변화나 인구 증가 때문일 수 있다. 일각에서는 로마 제국 주변의 여러 게르만 부족들이 과거 아르미니우스가 꿈꿨던 통일된 게르만 제국을 이루려는 시도의 일환으로 로마의 의지를 시험했다고 보기도 한다. 마르코만니족과 콰디족은 전쟁 전까지 로마와 우호적인 관계를 맺고 로마 상품을 교역했으며, 이는 로마제 가정용품 및 관습에 대한 고고학적 증거를 통해 알 수 있다. 로마는 군사적, 영토적 지배와 함께 상호 이익이 되는 무역을 추구했다.
이 전쟁은 로마 북쪽 국경의 취약성을 드러냈고, 로마 군단의 절반(33개 중 16개)이 다뉴브강과 라인강에 배치되었다. 여러 게르만족들이 다키아, 판노니아, 게르마니아, 심지어 이탈리아와 같은 변경 지역에 정착했다. 이는 새로운 현상은 아니었지만, 이번에는 정착민의 수가 많아 다뉴브강 좌안에 사르마티아와 마르코만니아를 포함한 두 개의 새로운 변경 주가 만들어졌으며, 여기에는 오늘날의 체코와 슬로바키아가 포함되었다. 라벤나에 정착한 일부 게르만족은 반란을 일으켜 도시를 점령했다. 이러한 이유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더 많은 야만족을 이탈리아로 데려오는 것을 결정하지 않았고, 심지어 이전에 그곳으로 데려온 사람들까지 추방했다. 게르만 부족들은 일시적으로 제지되었지만, 마르코만니 전쟁은 결국 4세기와 5세기에 서방 로마 제국을 해체하고 멸망시킬 침략의 서곡에 불과했다.
5. 지도
참조
[1]
서적
Historia Augusta, Marcus Aurelius, 12, note 92
[2]
웹사이트
Meditations, Book 1, at the Internet Classics Archive
http://classics.mit.[...]
[3]
서적
The communings with himself of Marcus Aurelius Antoninus
William Heinemann
[4]
뉴스
BBC: Past pandemics that ravaged Europe
http://news.bbc.co.u[...]
BBC
2005-11-07
[5]
서적
Historia Augusta, Lucius Verus, 9.7-11
[6]
서적
Cassius Dio, LXXII.8-10
[7]
서적
Cassius Dio, LXXII.13-14
[8]
서적
Cassius Dio, LXXII.16
[9]
문서
A branch of the Sarmatians, the Iazyges were much prized as heavy, or "cataphract", cavalry
[10]
서적
Historia Augusta, Marcus Aurelius, 24.5
https://penelope.uch[...]
[11]
서적
Historia Augusta, Lucius Verus, 9.7–11
[12]
서적
Historia Augusta, Marcus Aurelius, 24.5
https://penelope.uc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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